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백병원은 한국 정치사에 중요한 국면에 늘 등장하였다. 해방 이후 김구, 장택상, 장덕수, 장면 등에 대한 암살 및 피습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몇몇 대학 병원도 있었지만 외과라면 백병원을 떠올릴 정도여서 백병원은 해방 이후의 정치 사건에 많이 등장하였다. 1960년 4·19혁명은 그러한 중요 정치적 사건 중에서는 최고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백병원은 당시 외과 영역에서는 전통과 시설, 실력 등 최고의 병원이었다. 아래는 매일경제 1969년 8월 19일자에 소개된 [인술 탐방 전문 병원 순례 (1) 백병원편]의 기사 내용이다.

인술(仁術) 탐방 전문 병원 순례 (1) 백병원편(白病院篇)
외과(外科)선 전통(傳統), 권위 과시 시설 등 일본보다 앞서

"현대 의학은 곧 외과 의학"이라고 말하리만큼 외과 영역은 오늘날 치료 영역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겨우 후진국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된 우리나라와 같은 현실정에서도 외과(外科) 의학만은 세계 수준을 육박하고 있으며 소형 수술로부터 대형 수술에 이르기까지 외과 의학은 급진적으로 발전된 것이 사실이다. 이런 도약 단계의 상황 속에서 백병원은 외과 의학의 [보스]와 같은 존재로서 30년의 전통과 함께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외과 전문 병원이다.

1939년 일제 시 백인제 박사가 이룩해 놓은 외과 전문 병원이며 미국의 [메이요클리닉]이 이상형으로 경영해 오다 45년 6.25전쟁으로 납북됨으로써 현 가톨릭의대 김희규 박사가 대를 이어 제2대 원장으로 취임, 재단 법인으로 비영리 의료 기관이 됐다. 1962년에는 백인제 박사의 조카 백낙환 박사가 제3대 원장으로 취임, 백병원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소형 수술로부터 대형 수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외과 수술 환자들이 모두 이 병원을 거쳐 가리만큼 수많은 수술 환자를 취급한 이 병원은 수술 전문 병원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특히, 위장 수술을 주축으로 수술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종합 병원과 똑같은 규모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한 외과 전문 병원으로 손꼽고 있다.

서민층을 대상으로 환자를 취급하고 있는 이 병원은 비영리 의료 기관으로서 환자의 능력에 따라 수술비를 받는 [인술] 그대로의 병원이다. [워싱턴], [보스턴], 구라파, 일본 등 선진국의 외과 대학을 유학하고 돌아온 백낙환 원장은 "병원은 곧 인술이요 환자를 치유하는 데 최대의 목적이 있다"고 전제하면서 "현대 의학은 곧 외과 의학"이라고 말하고 종래의 외과 영역과 달리 오늘날의 외과 영역은 모든 영역의 주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6.25전쟁으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미국의 최신 외과 의학이 우리나라에 직수입되어 국제 수준을 육박하며 일본의 외과 의학을 앞지르고 있다고 자랑했다. 1천여 평의 대지를 갖고 있는 이 병원은 종합 병원 못지 않게 심장 외과의 특수 시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갖추고 있으며 곧 외국 의료 차관을 도입, 최신 [매머드]병원을 건설할 계획이다.
백원장 밑에 10여 명의 의사가 있으며 연중 무휴로 수술 환자의 수술에 여념이 없는 비영리 의료 기관이다. 백원장은 현재 가톨릭의대 외과 교수이며 서울의대 외래 교수이기도 하다. 당년 44세.

백인제 박사의 조카로 1950년대 초부터 백병원에 헌신해 온 백낙환 박사(전 이사장)는 1963년 5월 3일 제3대 원장에 취임한 이래, 원장, 외과과장, 가톨릭의대 및 서울의대 의과대학 교수, 당직의사, 원무과장 등 1인 3~4역을 담당하면서 백병원 중흥을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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