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사 1950년 7월 19일 6·25전쟁 중에 백인제 박사가 납북되면서 백병원은 존립이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설립자의 높은 뜻을 그냥 무산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설립자의 직계 제자인 김희규 박사를 위시하여 윤덕선(한림대학 설립자), 전현오, 신현구, 그리고 가장 나이 어렸던 백낙환(전 이사장)이 가담하여 백병원 재건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은 1955년 11월 28일 경향신문 '피랍 인사의 가정을 찾아서 의사 백인제 씨'의 기사이다.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다.

"피랍 인사에 대한 일을 사회에서 모두 잊으신 것만 같고 쓸쓸하고 외롭더니 이처럼 수고를 하여 주시어 한결 마음에 위로도 될뿐더러 희망도 생깁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는 최경진 여사는 어딘지 모르게 교양과 기품이 풍기었다. 지긋지긋한 쓰라린 얘기를 새삼 끄집어 내기는 가슴이 북받치고 괴롭고 무섭기까지 한 일이었으며 다시금 입에 담기 싫은 말이었으나 안경 너머로 고요히 서리는 눈물을 감추며 "매일 이렇게 처량한 얘기만 듣고 다니시기에 더 피곤하실겝니다."고 착잡히 얽히는 슬픈 감정을 넌지시 누르고서 그보다도 인사의 도리를 다하는 여사의 속 깊은 심금이 더욱 기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오히려 여사는 예의상 하는 수 없이 쓰라린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끔직스러운 육이오가 일어나고 괴뢰군이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백인제 병원을 놈들이 포위했으며 가족은 그대로 집 속에 감금되고 백박사만은 피신을 하였다고 한다. 병원과 집이 몰수를 당하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가회동 집으로 옮겼으며 박사가 피신한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지나던 어느 날 새벽같이 박사는 두 청년에 끌리어 가족이 있는 가회동 집으로 왔더라는 것이다. "늙은 아버님을 한 번만 뵙고 가겠다고 하니 놈들이 끌고 온 것이었어요. 마침 시동생(백붕제)도 집에 숨어 있었는데 놈들에게 들켜서 한날한시에 두 형제가 끌려가고 말았지요. 그것이 7월 19일 새벽입니다. 그러고선 지금까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풍문에 이러니저러니해도 그것은 믿을 수가 없고 다만 언제든 꼭 돌아오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외국에 볼일 보러가셨다가 그곳에 계실 기한이 차서 오실 때가 되면 오시던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 듭니다."
책상 위에 88점을 받은 산수의 시험 답안지가 놓여 있었다. 막내딸 금주 양(덕수국민교 2년 8세)의 것이었다.

장녀 향주 양(24세)은 미국 보스톤에 있는 윌슬리대학(식물학과 4년)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장남 낙조 군(20세)은 일본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국제기독대학의과(3년)에서 수학하고 있다고 한다. 여사는 두 자녀의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차녀 남주 양(경기여고 2년 17세), 2녀 향남 양(경기여중 1년 14세), 차남 낙훤(덕수초등학교 4년 11세), 그리고 4녀 금주 양을 거느리고 한편 광대한 병원을 보살펴 나가기에 여사는 늘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인 백인제 박사가 납북된 후 동란 중 공산당의 손에 여지없이 폐허가 되어 버린 병원을 여사는 삼 년 동안이나 걸리어 복구시키는 데 애로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모든 일에 철저하던 백 박사이기에 시설도 기구도 충실한 것이었으므로 그만큼 복구도 힘이 드는 일이었다. 박사는 제자를 잘 길러 놓았기 때문에 박사가 없는 지금에도 전에 부원장이던 김희규 박사가 현 원장으로 열심히 일을 하여 병원 경영에나 환자의 치료나 수술에도 조금도 불안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방 안에는 사변 때 전부 없어지고 가구라곤 하나도 없었다. 가구보다도 여사는 병원의 침대 하나를 더 마련했다. "앞으로 기계를 조금만 더 사들이면 되겠습니다. 정말 무에서 유를 낳은 것입니다. 괴뢰군 놈들이 기계를 전부 가져가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이렇게 병원을 복구시켜 놓은 여사는 남편의 뜻을 받든 것이며 기다림의 태세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생활은 병원으로 유지됩니다. 외국에 가 있는 애들은 공부도 잘하는 것 같으며 학교의 원조도 받는 모양입니다." 여사는 온갖 쓰라림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남편이 없이도 있을 때와 다름없이 복구하였기에 "그이가 수술을 하고 진찰실에서 문득 나오는 것 같아요." 이런 느낌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느낌이 아니요 정녕 그런 날이 생생히 실현되기를 복구된 병원을 보면서 어찌 여사만이 간절히 바라고 느낀다 할 수 있으랴.

수술실 식구들 사진 좌.우. 외과전문병원으로 이름을 날렸던 백병원 수술실 식구들(1960년대 추정)

혈액원 1960년대 당시 외과 전문 병원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백병원은 하루 평균 4~5건, 많을 때는 10여 건 이상의 개복 수술 환자가 있어서 언제나 혈액 수급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에 이러한 혈액 수급의 문제를 자체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윤덕선 박사를 미8군 121병원의 협조를 받아 혈액 은행 실무 훈련을 받게 하였으며, 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백병원 1층에 있던 검사실에 붙여서 혈액 은행을 개설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병원 혈액원이다. 당초 백병원 혈액은행의 설치의 목적이 자체에서 소요되는 혈액 확보를 위한 것이었으나 다른 병원에게도 다소의 혈액을 공급 해 주기도 했다.

백병원의 혈액원은 국립혈액원에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생겨난 사립 병원의 혈액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정부에 의해서 1954년 6월 7일에 국립혈액원이 개설되기 앞서 1954년 초 민간 병원으로는 백병원에서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한 것이다. 대개의 병원들이 국립혈액원, 그 후에는 적십자혈액원에서 필요한 혈액을 가져다가 사용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택한 데 비해, 외과 전문의를 훈련시켜 혈액 은행을 개설하고 자체에서 직접 혈액을 확보하는 적극적인 해결 방법을 택한 백병원은 그 이후에 생겨난 많은 다른 사립 병원 혈액원의 표본이 되었다.

사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병원 혈액원인 '백병원 혈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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