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제와 유상규는 경성외전 외과학 교실의 교수와 강사 사이를 넘어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유상규는 백인제와 같은 해에 경성의전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결국 백인제의 제자가 되었다.
백인제와 유상규(1897-1936, 독립운동가, 의사)
<선각자 백인제>259면에 실린 김희규의 증언에 의하면 둘은 경성의전 동기이자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고 하며, 같은 책 235면 백향주의 증언에 의하면 백인제의 집은 유상규의 동생 유상하가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백인제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기행문 <인도양(印度洋)을 건너며> 1937년 1월 13일자 첫 회분을 보면 유상규와의 관계에 대해 '二人同心(이인동심)의 존재'로 표현하고 있으며, 한 단락을 유상규의 사망에 대해 쓰고 있다. 백인제가 흥사단과 관계를 갖게 된 것도 유상규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인제는 해방 직후 흥사단에 가입하였으며 단우 번호는 1102번이다.
-최규진, 황상익, 김수연 '의사학 제18권 제2호 157-172', 2009.에서 발췌
백인제 박사는 1928년부터 지속적으로 통속 의학 강연회에 참여하여 의학 지식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여기서 '통속' 이란 대중을 상대한다는 뜻이다. 아래는 1935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 내용이다.
의전 교수 백 박사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알거니와 백인제 박사는 해교(該校: 경성의전) 외과과장으로서 유명할 뿐 아니라 외과학에 있어서 조선의 권위이다. 박사의 강의 시간에는 무더운 때라도 낮잠을 잘 수 없으며 그 수술을 볼 때는 감탄의 소리를 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다.
1930년 11월 16일 동아일보 통속 의학 강연회 공고 및 기사
1935년 10월 24일 동아일보 통속 의학 강연회 공고 및 기사